"이자리에 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창단 28년째를 맞아 다시 원년 멤버가 모여 연주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지난 7월 12일 '베데스다 4중주단' 콘서트 마지막 날, 첼로를 맡은 동료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에게 처음 음악을 알게 해 주신 강민재 선생님, 그리고 많은 분들의 도움과 사랑이 아니었다면...솔직히 우리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잇을지 모르겠습니다. 음악을 할 수 잇도록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휠체어 위의 세 사람, 목발을 의자 옆으로 가지런히 내려 놓은 한 사람. 이렇게 우리 넷은 활을 잡고 'Amazing Grace"를 연주하기 시작햇다. 35년 전 암흑 속에서 처음 음악을 만난 이후 놀랍게 인도되었던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 객석에 울려 퍼졌다. 처음 그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아름다운 선율로.
'와 세상에 저런 소리가 다 있구나! 내가 저걸 배울 수 있다니!" 바이올린 소리를 처음 듣고 난 거의 넋을 잃고 말았다. 그때가 대전 성세재활학교 3학년 시절. 소아바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난 장애아동들이 모여 공부하는 기숙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다.
당시 코흘리개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시연해 보인 사람이 바로 강민재 선생이었다. 그는 대전에서 잘 알려진 음악가였는데, 어느 날 학교 앞을 지나다가 우리가 무료하게 지내는 모습이 안쓰러워 음악을 가르쳐 주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암흑 속에서 진창을 더듬어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동정과 차별은 물론, 나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어떤 꿈이나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면서 난 처음으로 내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었고,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때까지 그런 식으로 음악을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바이올린을 열심히 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음악을 해 봐라. 네가 가야 할 길은 그 길밖에 없다." 그때 뜻밖의 제안을 한 것은 재활학교 시절의 은사였다. 바이올린을 함께 배웠던 멤버가 모여 현악 4중주를 결성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중학 과정을 졸업한 후 딱히 갈곳도, 할 일도 없어 막막했던 우리는 방을 얻어 합숙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베데스다 4중주단'이 탄생했다. 우리는 나름대로 정기연주회도 열고, 불러 주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음악을 들려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갔다. 힘들었지만,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음악을 할 수 있었기에 그 가난하고 궁색한 시간들을 묵묵히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배움의 길이 열렸다.
장애인 현악 4중주단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어느 교수님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틈틈이 검정고시로 중 . 고등학교 과정을 마쳐 놓았는데 그것이 이렇게 유학으로 이어질 줄이야!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거야. 정말 열심히 배워 와야지.' 처음으로 밝은 미래를 그려보며 동료들과 신시내티 행 비행기에 올랐다. 더욱 깊은 배움이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 주리라 확신하며.
1999년, 당시 나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지휘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사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둘 태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후원과 사랑으로 내게는 참으로 과분한 기회와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뿌연 안개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무얼해야 하나?'
고국에 정착하려고 몇 년 간 한국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해 보았다. 하지만 장애인으로서 넘어야 할 고개가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막막한 심정으로 미국으로 돌아와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그 공부도 막바지에 접어들어, 갈 길을 분명히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동안 피아노 레슨 등으로 혼자 뒷바라지해 온 아내를 생각해면 하루라도 빨리 내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제가 가야 할길을 보여 주세요.' 새벽이면 답답한 마음을 안고 교회를 찾았다.
그 무렵이었다.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미국 전체 대학의 채용정보를 알려 주는 정기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오하이오 주 라이트 주립대학 기악과 교수 모집'. 메일을 열어 보기 전 잠시 망설여졌다. 사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몇군데 학교에 원서를 낸 일이 있었다. 그때 난 채용 담당자들로부터 너무도 분명한 답변을 들었다. 장애인이어서 힘들 거라고. 수많은 계단을 지나 강의실을 옮겨 다니느 것도 그렇고, 많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힘에 부칠 거라고. 실망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실력이 비슷하다면 건강한 사람이 더 유리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쓰라린 경험 때문에 미국에서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냥 한번 읽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런데 모집 공고를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어느 대목에 이르러 멈춰 섰다. '자격 요건: 현악기 전공자, 지휘 전공자, 현악 4중주 유경험자'. 세 가지 분야를 명시하고 있는 점도 특이했지만, 그것은 바로 내가 차례로 거쳐 온 분야가 아닌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 역량이 모자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지원 자걱은 되는 셈이다.' 한번 도전해 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각종 서류와 자료 등을 정성껏 준비해서 부친 후, 외출도 삼가고 전화 옆에 붙어 있기를 2주, 나는 심사위원단과 전화로 면접을 치르게 되었고 그 후 몇 주가 지나 다시 연락이 왔다. 전체 지원자가 83명 가운데 내가 최종 합격자 3명 안에 들었다는 믿지 못할 소식이었다. 기뻐할 새도 없이 마지막 시험 준비로 마음이 바빴다.
3일간 심사위원들 앞에서 바이올린 독주와 오케스트라 리허설, 개인 레슨 하는 모습을 선보여야 했다. 심사위원과 함께 하는 식사 시간마저도 평가 과정에 포함될 정도로 빈틈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서는데 그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힘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흐른 어느 날이었다. "축하합니다, 차 교수님. 라이트 주립대학 음악과 교수로 최종 선발되셨습니다." 무심코 전화을 받고서, 멍하니 듣기만 하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왜 내가 됐을까?'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최종 세명 중에 정말 내가 가장 뛰어났던 것일까.' 설사 그렿다 해도 내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하이오는 특히 백인의 비율이 높아서 이방인에게는 배타적인 분위기였다. 난 동양인인데다 영어도 유창하지 못하며, 게다가 지원자 중 유일한 장애인이었다. 그들에게 난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채 학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채용위원이었던 동료 교수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내가 장애인인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나요?"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철저히 능력 위주로 뽑았습니다. 오히려 같은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장애가 있는 사람이 더 유리할 수 있지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산 증인이니까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장애가 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니!
부임 후 학교 강당에서 첫 라사이틀을 열던 날, 객석은 학생들과 교직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호기심 반 기대반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들 속에서, 난 나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읽어 낼 수 있었다. 휠체어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임을. 나는 눈을 감고 음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실었다. 곡이 끝나고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 비록 일어나서 답례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와 기대를 안겨 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박수 소리를 통해 낮은 곳에서 절망하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시는 그분께.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 길이 어디에 닿아 있을 것인지 모르는 채로 그저 걸어 왔다. 휠체어 위에서 익혔던 바이올린, 현악 4중주, 그리고 지휘.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엮어질지 전혀 모르는 채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쳐 온 시간과 경험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선하게 스기 원하셨다.
나는 이제 바이올린 연주자로, 현악 4중주 단원으로, 그리고 휠체어 위의 지휘자로 다시 그 길을 가려 한다. 그분이 연주하는 내 인생의 선율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가이드포스트 9월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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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위의 선율 - 차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