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우유 좀 사 달라는 아내의 말에,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풍성한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커다란 수퍼마켓들을 여러 개 지나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선다.
작은 구멍가게가 여느 때처럼 나를 소박하게 반긴다.
이름은 무슨 수퍼마켓이지만, 간판에는 전깃불도 못 집어넣어서
수퍼(Super)라는 화려한 이름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가게 한편에 붙은 쪽방에서 문을 드르륵 열고 나오는 주인 할머니.
주름이 깊게 파인, 변함없이 시름 많은 얼굴로 나를 맞는다.
안양.
지금은 신도시가 되어 무슨 아파트들이 그렇게도 많이 들어섰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어릴 적에는 논도 많고 물도 맑은 작은 도시일 뿐이었다.
동네 한 켠에는 작은 도시에 걸맞는 시장 하나가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부쩍 커 버린 입장에서 지나가 보면 조그만 시장에 불과하지만,
어릴 적 어머니 손에 이끌려 장을 보러 갈 때면,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광대한 시장이었다.
펄떡이는 물고기들과 풍성한 야채들, 그리고 장난감과 옷가지도 많은 시장이었다.
그런데, 깨끗한 나무 진열대 위에 여러 가지를 차려놓은 상점들을 과감히 지나쳐,
어머니가 항상 내 손을 이끌고 찾아간 곳은 실망스럽게도,
어떤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차려 놓은 좌판이었다.
할머니는 그냥 길 가에 돌덩이 하나 놓고 앉아서 시금치며 오이, 오뎅, 그리고 깻잎 등을 팔았다.
큰 가게들보다 특별히 싸거나, 더 많이 준 것도 아니었는데,
어머니는 줄기차게 그 곳만 갔다.
자선행위 차원에서였을까? 아니다.
10원 한장이 아쉬웠던 우리 집 형편으로서는,
그 할머니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사준다든지 아니면 더 자주 간다든지 할 여력은, 정말이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내 손을 잡고 할머니에게 가서 야채를 사다 말고,
"얼마나 추우세요..." 라며 그렇게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할머니께 속삭였던 것이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이 말을 듣고도 다 헤어진 머플러를 두른 야윈 얼굴에
허연 이를 드러낸 채 웃고만 있었던 할머니의 그 표정도
결코 내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아, 어머니가 항상 그곳에만 가신 것은 이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니가 생각나서 안타까와했을 수도 있다.
할머니를 많이 돕고 싶으셨겠지만,
병든 남편과 어린 아들을 위해 찬거리를 사려고,
당신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오백원짜리 지폐 한 장이며, 백원짜리 동전 몇 닢들을 보고
그 안타까움을 삼켜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안타까움과 함께 넉넉치 못한 사람들끼리의 강한 연대감 같은 것이 어머니 가슴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을 수도 있다.
내 발길이 화려하고 친절한 수퍼마켓들을 무심코 지나
조그만 구멍가게, 시름많은 주인 할머니에게로 자꾸만 향하는 것 또한,
어머니와 손 잡고 "할머니를 만나러" 시장에 다니던 그 기억 때문일까?
월간 샘터(노성철)
|
|
구멍가게